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 불가침조약 (문단 편집) === 영국의 입장 === > 영국제국은 1920년대초부터 1차세계대전 이후 여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의 모순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에 직면했다. 사실 전시 동맹에도 불구하고 1차대진 이후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파트너 관계라기보다는 경쟁자 관계였다. 그 이유는 "동맹국의 제국주의와 해군주의"에 대한 윌슨의 혐오감에 있었다. ---중략--- 따라서 파국이 도래할 때까지 영국은 미국과의 갈등을 제거하거나 파트너쉽을 구축하려 하지 않았다. > 체임벌린이 독일과의 유화정책을 추진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지원의 대가로 영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요구할 것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체임벌린은 제국특혜관세의 수정과 미국의 무역과 투자에 제국을 개방하는 것을 포함하는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질서를 수용하기보다는 독일과의 유화를 추구했다. > 1925년 10월에 체결된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위상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쟁을 위협하는 실질적 위협은 동쪽에 있는데 로카르노 조약은 이 문제를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은 서부 유럽에서의 현상유지의 의무가 있지만,동유럽에서의 전쟁에 서유럽으로 확산될 경우에는 의무가 없다. 사실 로카르노 협상전의 영국의회에서 요구한 조건 중 하나가 동부 유럽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Lothian and the Problem of Germany, 1933-193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29681|인용]] 영국은 그렇다고 미국을 꼬드기지도 않았다. 미국도 미국대로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해체를 [[민족자결주의]]운운하며 국가시책으로 내걸고 있는 [[반란군]]의 나라였고 소비에트도 마찬가지였다. 체임벌린은 독일보다 미국과 소련을 더 위험한 국가로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그 두 국가가 [[대영제국]]을 해체했으므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다만 영국은 [[영일동맹]]과 베르사유 조약 이후 내내 독일 편을 들어준 것, [[뮌헨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도와준 것으로 인해 일본과 독일 이 두국가가 [[대영제국]]의 가장 큰 전략적인 위협인 소련과 미국을 견제하고, 가능하면 독일과 일본이 이들과 전쟁까지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다만 일본과 독일이 막상 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그들은 군축으로 허약해진 대영제국부터 물어뜯기로 결정했고 [[프랑스 침공]]과 [[말레이 해전]]에서의 참패로 영국은 '''기르던 개들에게 물리는 추태'''를 연출하게 되었다. > 체임벌린은 국민생활이 전력증강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육군장관 호어-벨리샤가 방위산업 활성화를 통한 경기활성화 방안을 보고했을 때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항상 재무장을 위한 여유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1937년까지 재무장을 위한 예산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중략 --- 영국의 역사학자 파커는 체임벌린의 편협한 정책관보다 그의 독선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중략--- 고데스베르크 회담 이후 대부분의 정책전문가들이 히틀러는 유화정책을 악용하고 있으며 정책 수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을 때, 이 권고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 결정 과정과 평화체제 유지의 상관관계 연구 한승윤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8348e33e68e4cf4cb7998d826d417196&keyword=%EC%B2%B4%EC%9E%84%EB%B2%8C%EB%A6%B0|인용]] 네빌 체임벌린에 대한 수정주의적 평가가 극단적인 나머지 독일에 대해 가장 엄격한 지도자라거나 영국 재무장의 기수같이 묘사하는 서술들이 있지만, 사실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다. 체임벌린은 재무장관이던 시절부터 다른 누구보다 과감한 군축으로 인기를 얻은 정치인이었고 뼛속부터 군대를 거추장스럽고 비싼 기구라고만 생각했다. 대전쟁의 기운이 다시 닥쳐오고 전력증강의 요구가 거듭되어도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 최소한의 무장안만을 재가했을 뿐이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미국과 소련 두 국가와 제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다급한 초청에 대해 해군 소장 나부랭이를 보내어 시간이나 보내다 오게 만듬으로서. 소비에트의 동맹요구에 대해 정중하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전간기 내내 일본으로 미국을, 독일로 소련을 막을 생각으로 가득해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기운이 고조됨에 따라 처칠등이 소련과의 동맹을 통해서라도 독일을 제어해야한다고 주장했음에도 체임벌린 정권은 이 두국가와의 제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히틀러의 공격방향을 동쪽으로 돌리는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한발 빨리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의 진격 방향을 서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그 대가로 실각하고 분사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대해 추가적인 자세한 내용은 "필사적인 포옹 : 독·소 불가침 조약 (1939·08·23)과 소련 측의 동기분석"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는 Geoffrey Roberts의 논문을, 전통주의적 해석은 The Deadly Embrace: Hitler, Stalin and the Nazi-Soviet Pact라는 책을 보기를 권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